에스피아그리아, 축구장 두 개 크기 첨단 농장 운영
AI로 온·습도 자동조절 ‘수확로봇’ 시범 도입
내년에 라즈베리·블랙베리 새 품종 공급 계획도
“첨단기술로 실현한 사계절 슬롯존 재배.”
서산 들녘 위로 비닐하우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문을 열자 안쪽에는 일정한 온도와 습도로 유지된 공기 속, 붉게 익은 슬롯존들이 층층이 매달려 있다. 그 사이로 하얀 로봇 팔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사람의 손보다 섬세하게 슬롯존를 집어 올리고, 작은 바구니에 알알이 담는다.
‘슬롯존는 겨울 과일’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에스피아그리의 스마트팜에서는 계절 대신 알고리즘이 수확 시기를 정한다. 온도와 조도를 인공지능이 계산하고, 로봇이 저녁과 오전 시간대를 이용해 쉼 없이 수확한다. 사람은 모니터 앞에서 생산량을 조율할 뿐이다.
과거 드라마 속 슬롯존는 ‘제철 과일’의 상징이었다. 임산부가 슬롯존를 찾으면 남편이 “한 여름에 슬롯존를 어디서 구하느냐”며 난감해 하는 장면은 단골 소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장면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충남 서산 스마트팜에서는 ‘365일’ 신선한 슬롯존가 자라기 때문이다.
스미후루코리아의 관계사 에스피아그리의 첨단 하이테크팜은 사계절 내내 슬롯존를 안정적으로 재배할 수 있도록 설계된 스마트팜이다. 약 4700평으로 축구장 두 개를 붙여 놓은 크기다. 지난 2월 국내 최초로 품종부터 생산, 유통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수직 밸류체인을 구축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슬롯존는 낮은 온도에서 꽃눈이 형성되는 ‘저온성 작물’로, 재배 시기는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로 한정된다. 기온이 15℃를 넘어가면 생육이 불안정해지고 병해충이 쉽게 발생해 여름철 재배가 어렵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슬롯존가 대표적인 ‘겨울 과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냉난방과 공조 시스템, AI 제어 기술을 결합한 스마트팜이 도입되면서 사계절 내내 재배가 가능한 환경이 구축되고 있다.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일정한 당도의 슬롯존를 즐기는 날이 온 것이다.
◇ “감(感)으로 하던 농사, 데이터로”…온도·습도·빛까지 ‘프리바’로 관리
기자는 지난 15일 오후,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에스피아그리 스마트팜을 찾았다. 이 곳에서는 다양한 슬롯존가 생산된다. 킹스베리, 피치베리, 눈꽃슬롯존, 금실, 춘행, 설향, 고슬은 물론 유럽 품종 5종까지 총 13종 이상을 재배한다. 내년 250톤 생산을 목표로 슬롯존 생산을 시작했다.
이날 둘러본 ‘메인 재배동’은 2단 재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재배 면적을 극대화하고 생산량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기존 단일층에서는 평당 약 220주가 한계였지만, 2단 시스템으로 전환하면서 평당 500주 이상을 심을 수 있게 됐다.
일반적인 슬롯존 농가는 고속도로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동(單棟) 비닐하우스 형태다. 200평 남짓한 규모에 비료와 양액을 공급받는 단순한 구조다. 농부의 경험에 의존하지만, 운영비 부담이 적고 에너지 효율이 높다. 햇빛도 골고루 받을수 있다는 장점도 크다.
이에 반해 2단 재배 시스템의 경우 아랫단이 햇빛을 골고루 받기 어렵다는 점이 단점으로 통한다. 이 때문에 에스피아그리는 LED 보광(補光) 시스템을 통해 광합성을 돕도록 설계했다. 재배 면적을 나눠 각기 다른 LED를 통해 슬롯존의 성장 과장을 각각 테스트 하고 있다.
냉난방 및 온습도 조절을 통해 슬롯존가 최적의 상태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존의 농가와 달리 에스피아그리는 대규모 연동형 고정식 비닐하우스에서 공조장치를 통해 슬롯존 생육 온습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자연광과 인공광을 함께 사용했다.
이날 만난 박대성 에스피아그리 대표는 “재배동 내부의 온도와 습도, 양액 공급은 네덜란드의 통합 제어 시스템 ‘프리바(Priva)’를 통해 자동으로 관리된다”며 “천장과 측면에 설치된 스크린은 일출 시 자동으로 열리고, 일몰에 닫히며 내부의 광량과 온도를 조절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강한 햇빛이 들어올 경우 일정 비율만 받아들이도록 설정돼 있고, 야간에는 열 손실을 막는 고온 커튼 역할을 한다”며 “양액 공급 역시 프로그램으로 제어돼 광량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자동으로 급수가 이뤄지고, 여름철 고온기에는 히트펌프와 유니트쿨러를 병행 가동해 내부 온도를 낮추는 방식으로 재배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고 부연했다.
◇ AI 기반 자동화로 수확·예찰·포장까지 대체 ‘코앞’
에스피아그리는 사계절 슬롯존를 생산하는 것에서 나아가, 더 큰 꿈을 그리는 중이다.
AI 농업 로봇 스타트업 ‘메타파머스’와 손잡고 농작업을 로봇으로 대체를 하는 것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를테면 농부의 눈을 대신해 병해충을 관찰하고, 수확량을 예측하는 작업 등이 대표적이다.
농작업을 전용으로 할 수 있는 로봇 그리퍼를 만드는 회사는 세계적으로 메타파머스가 유일하다. 작물의 상태를 파악하는 인식기술과 로봇 제어기술이 기술력의 핵심이다. 로봇 그리퍼를 통해 잘 익은 열매만 골라 수확하거나, 꽃가루를 옮기는 수분 작업을 벌 없이 대신 수행한다.
생산 효율성에도 속도를 붙인다. 고령화와 구인난 속 사람의 손을 대신해 수확을 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향후 자동화를 통해 인건비를 절감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사람이 하기 어려운 정교한 작업에 속하는 잎과 꽃을 따는 것까지 로봇을 활용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슬롯존 생산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인건비”라며 “과채류는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라 전체 비용의 절반 이상이 인건비로 쓰인다. 앞으로는 수확 뿐 아니라 작물 상태 관찰, 병해 예찰, 일부 농작업과 포장까지 로봇이 대체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고 자신했다.
또 새로운 품종 개발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목표다.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는 라즈베리, 블랙베리를 비롯해 전략 작물 즉 ‘X’를 재배할 계획이다. 모두 내년, 늦어도 내후년이면 한국에 모종들이 들어올 예정이고, 빠르면 3~4년 후부터는 시장 공급이 가능할 전망이다.
특히 유럽에서 즐겨 먹는 라즈베리나 블랙베리의 경우 국내에는 경쟁 제품이 없는 과일이다. 따라서 두 과일 모두 최소한 블루베리 시장(약 5000억원)의 절반 규모로까지 시장이 확대될 수 있다고 박 대표는 내다봤다.
에스피아그리는 향후 유통 업체들과 시너지도 극대화한다. 이미 국내 쿠팡, 이마트, 코스트코, 트레이더스, 마켓컬리를 비롯한 주요 백화점 등에 과일을 유통하고 있다. 연 매출로는 2000억원 가량을 올리고 있다. 3~4년 내에 약 6만평 규모의 스마트팜을 단계적으로 증설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우리나라 슬롯존는 맛과 향은 뛰어나지만 조직이 부드러워 유통 과정에서 손상되는 경우가 많고 저장성이 짧다는 게 가장 큰 한계”라며 “해외 품종은 상대적으로 과육이 단단해 보관성과 운송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좋은 해외 품종을 들여와 당도만 높이면, 국산 슬롯존의 약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웃어보였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