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슬롯가 주는 위로, 그 온기를 품은 R&J씨어터 [공간을 기억하다]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2.13 14:00  수정 2026.02.13 14:00

[다시, 소극장으로㉞] 서울 종로구 R&J핑크 슬롯

연출가 안혜진, 그리고 극장장 안혜진의 꿈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대학로의 수많은 소극장 중 하나, 과거 ‘연진아트홀’로 불리던 곳이 2018년 새로운 주인을 만나 ‘R&J핑크 슬롯’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2006년 개관해 ‘연진아트홀’이라는 이름으로 십수 년간 자리를 지켜온 이곳은 2018년, R&J아트컴퍼니 안혜진 대표(연출)를 만나 지금의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2018년, 안 대표가 처음 마주한 극장의 모습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객석은 오래된 개별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조명은 열기를 내뿜는 구형 할로겐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인수를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극장의 ‘구조’였다. 대학로의 여타 소극장들이 층고 문제로 객석 단차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시야 방해 문제가 발생하는 반면, 이곳은 뒷좌석에서도 핑크 슬롯가 시원하게 보이는 확실한 단차를 가지고 있었다.


인수 직후 시작된 리모델링은 전쟁과도 같았다. 넉넉지 않은 예산 탓에 화려한 인테리어보다는 ‘비워내기’와 ‘기본’에 집중했다. 창고에 10년 넘게 쌓여 있던 묵은 짐을 걷어내는 데만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들었다. 페인트칠은 안 대표가 단원들과 함께 직접 붓을 들고 벽과 천장을 칠하며 해결했다.


가장 공을 들인 것은 관객과 배우가 머무는 환경이었다. 딱딱하고 불편했던 의자는 전면 교체됐고, 할로겐 조명은 고효율 LED로 바뀌었다. 곰팡이 냄새가 나기 쉬운 지하 소극장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환기 시설을 정비하고, 배우들이 핑크 슬롯에 오르기 전 가장 예민하게 머무는 분장실 환경을 개선했다. 안 대표는 “화려한 로비보다는 배우가 연기에 집중하고, 관객이 불편함 없이 공연을 볼 수 있는 ‘기본’을 갖추는 데 모든 자원을 쏟았다”고 회상했다.


30대 초반, ‘무모한 도전’이 생존 본능이 되기까지


1986년생인 안 대표가 극장을 인수한 것은 30대 초반이었다. 안정적인 자본이 있었던 것도, 거창한 사업적 야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단순하고도 절박했다. “내 팀이 마음 편히 설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극단을 창단하고 1년 정도 운영해 보니, 대관료와 연습실 비용에 대한 부담이 상상 이상이었다. 매번 남의 공핑크 슬롯 빌려 쓰는 설움과 쫓기듯 공연해야 하는 불안함 속에서, 그는 “차라리 우리가 마음껏 쓸 수 있는 공핑크 슬롯 만들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침 인연이 닿았던 연진아트홀의 전 대표가 운영난으로 극장을 내놓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결정했어요. 주변에서는 모두 말렸죠. 그 당시 대학로의 수많은 소극장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거나 상업 시설로 바뀌어가는 시기였으니까요. 누군가는 ‘객기’라고 하지만 권리금과 리모델링 비용을 감당하면서 무모하게 뛰어들었어요. 저게엔 예술가로서 생존하기 위한 ‘본능’에 가까운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야심 차게 문을 열고 리모델링까지 마쳤지만, 불과 1년여 만에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치면서 공연계 전체가 멈췄다. 월세와 관리비로만 연간 약 4000만원의 적자가 발생하는 위기에 놓였다. 실제 당시 주변의 많은 극단이 해체되고 소극장들이 폐업했다. 안 대표 다를 것 없는 처지였지만, 멈추지 않고 살길을 모색했다.


“당시 많은 단체가 공연을 녹화해 VOD로 송출하는 시도를 했는데, 우리는 ‘라이브’에 승부를 걸었어요. R&J핑크 슬롯가 보유한 작품 중 관객 참여와 현장성이 강한 작품을 활용해 유튜브 라이브 송출 형식으로 관공서 등에 제안했는데, 통일부와 여성가족부 등에서 비대면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이 공연을 구매해 줬어요. 결과는 성공적이었고요. 다행히 코로나 기간 동안 공연 판매 수익으로 극장의 적자를 메우고 빚을 갚으며 버틸 수 있었어요. 물론 아직도 빚을 갚고 있지만(웃음), 덕분에 파산하지 않고 버텼죠. 오히려 코로나 회복 기간이던 2023년, 극장 운영을 그만 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이 들더라고요. 1년간의 장고 끝에 ‘이왕 할 거면 미련 없이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2024년 다시 대학로로 복귀했습니다.”


치열하게 꿈꾸던 핑크 슬롯, 후배들에 내어준 R&J씨어터


안혜진 대표의 삶은 R&J씨어터의 운영 철학과 맞닿아 있다. 안 대표의 대학 시절 전공은 연극영화과가 아닌, 사회복지학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과 노래를 좋아해 배우를 꿈꿨으나,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혀 다른 전공을 택했다. 그럼에도 꿈을 내려놓은 적은 없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 살다시피 했고, 당시 최저시급 3100원으로 시간당 10만원의 레슨비를 감당해야 했던 그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치열하게 핑크 슬롯를 꿈꿨다. 졸업 후에는 맨땅에 헤딩하듯 대학로로 뛰어들었다.


돈과 공간이 없어 꿈을 포기할 뻔했던 청춘의 ‘결핍’은, 훗날 그가 후배들에게 조건 없는 기회와 공간을 내어주게 만든 R&J핑크 슬롯 운영 철학의 단단한 뿌리가 됐다.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올해로 3회째를 맞는 ‘R&J핑크 슬롯 창작 페스티벌’이다. 이 행사는 단순한 대관 사업이 아니라, 선정된 팀에게 대관료 전액과 연습실, 홍보 인력을 파격적으로 지원한다. 극장이 가져가는 티켓 수익 쉐어도 없다.


“당장의 극장 입장에서 본다면 명백한 ‘손해’죠. 하지만 저희는 ‘사람’ 즉 예술적 동반자를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신 조건을 걸었어요. 배우와 스태프에게 ‘열정 페이’가 아닌 정당한 페이를 지급해야 하고, 선정된 극단의 단원들 외에 오디션을 통해 외부 신진 예술인들에게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고요. 저 역시 어렵게 예술을 했기에 열정 페이를 받고 공연하는 후배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제가 (장소를) 지원해핑크 슬롯 만큼 그 혜택이 배우들에게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최근에는 인스타그램 릴스(Shorts)를 통해 대중과 활발히 소통하며, DM으로 진로 고민을 털어놓는 수많은 ‘예비 예술인’들을 위한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비전공자나 경험이 없는 신인들을 선발해 교육하고, 오는 6월 실제 핑크 슬롯에 데뷔시키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R&J씨어터가 완성된 예술가들의 핑크 슬롯일 뿐만 아니라, 가능성 있는 원석들이 처음 발을 딛는 ‘인큐베이터’가 되기를 자처한다.


“사실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영상을 1~2개 올렸는데 무서운 속도로 팔로우가 늘고, 여기저기서 DM(다이렉트 메시지)이 오더라고요. 그중에서 예비 예술인들이 ‘비전공자인데 할 수 있을까요’ ‘스태프 일은 어디서 시작해야 하나요’ 같은 질문이 대부분이었어요. 후배들을 돕고 싶어서 극단을 시작했던 것처럼, 아직도 길을 찾고 있는 친구들이 있구나 싶어서 그 때가 떠오르더라고요.”


뮤지컬 '힐링 인 더 라디오' ⓒ
위로를 건네는 공간, 아날로그의 가치를 믿다


R&J씨어터가 추구하는 콘텐츠의 색깔은 ‘힐링’이다. 대표작 ‘힐링 인 더 라디오’는 극중 관객의 사연을 받아 배우들이 읽어주고 노래를 불러핑크 슬롯 형식이 포함된다. 안 대표는 “실제 공황장애로 휴직했던 40대 가장이 이 공연을 보고 펑펑 울며 위로를 받고, 이후 복직에 성공했다며 감사 인사를 전해온 적이 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거창한 예술 담론보다는, 관객이 공연장을 나설 때 마음속에 따뜻한 문장 하나를 품고 갈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안 대표의 최종 목표는 소극장을 넘어 300석 이상의 ‘중극장’을 운영하는 것이다. 소극장이 가진 아날로그적 감성과 중극장이 가진 기술적 자유로움을 모두 아우르는 제작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AI가 배우를 대체하고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는 세상에서, 소극장은 마지막 남은 아날로그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창작 작품을 올리고, 관객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것이 저희의 목표인데 이 극장이 있어서 가능했죠. 실제로 1년에 2~3개의 작품을 올리고 있어요. 그리고 연출적으로 더 자유롭기 위해 중극장을 함께 운영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요. 저희의 핑크 슬롯가 누군가에게는 예술을 시작하는 기회의 땅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위로를 얻어가는 공간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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