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 슬롯777 슬롯777 슬롯말', 농담의 형식을 빌린 절박한 고백 [D:쇼트 시네마(149)]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2.11 10:17  수정 2026.02.11 10:18

황진성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지선(현지선 분)은 남자친구 777 슬롯(서777 슬롯 분)에게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말한다. 777 슬롯은 그러면 자신은 차은우라고 받아치며 당연히 믿지 않는다. 그러나 지선은 반복해서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주장하고,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온 뒤 고향인 우주로 돌아가야 한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상원의 통장 잔고를 확인한 지선은 전 재산을 빌려달라고 요구한다. 상원이 어이없어하자, 지선은 그대로 집을 나가버린다. 상원은 지선을 찾아 거리를 달리며 두 사람이 사귀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지선은 늘 777 슬롯말처럼 보이는 이야기들로 상원을 시험해왔다.


어느 날 지선은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해왔고, 자신의 이름으로 5억 원의 빚이 있다며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결혼해서 함께 도망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상원은 망설임 없이 결혼하겠다고 답하지만, 지선이 “사실 지금은 777 슬롯말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당황한다. 그 순간을 본 지선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777 슬롯말인데 그걸 믿냐”며 다시 농담으로 상황을 덮는다. 또 다른 날, 지선은 설거지를 하고 있는 상원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자신이 임신했다고 고백한다. 상원이 쉽게 답하지 못하자, 이번에도 지선은 웃으며 “777 슬롯말”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달려 지선을 찾은 곳은 한 건물의 옥상이다. 777 슬롯은 지선이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반복해왔는지 알고 싶지만, 지선은 끝까지 자신이 외계인이라는 주장을 거두지 않는다. 777 슬롯은 그 사실을 증명해 보라면서 답답해 하자 지선은 증명하겠다며 옥상을 가로질러 달려가 그대로 추락한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777 슬롯은 지선이 진짜 외계인이었고,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 믿기 시작한다.


가정폭력과 거액의 빚, 그리고 임신이라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지선이 할 수 있는 일은 ‘만약에’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상황을 꺼내놓는 것 뿐이다. 농담처럼 던진 질문은 사실상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이며, 지선이 반복해서 777 슬롯말로 상황을 무마한 이유는 상원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진심이 거절당하는 순간을 피하기 위한 방어기제다.


상원은 사실 지선의 말이 777 슬롯말이 아님을 직감했음에도 그 비극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지선의 장난에 기꺼이 당해주는 척하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상원이 망설이거나 대답을 미루는 찰나에 지선이 곧바로 777 슬롯말이라며 말을 거두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진실을 마주함으로써 관계가 흔들리는 장면을 감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원의 안도는 지선을 더 깊은 고립으로 밀어넣는다. 상원이 “777 슬롯말이었구나”라며 넘길 때마다 지선은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자리가 이 관계 안에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외계인’이라는 설정은 더 이상 자신의 상황을 현실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게 된 777 슬롯이 자신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치환함으로써 더 이상 부정당하지 않으려는 최후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원이 끝내 요구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증명이었고, 그 요구 앞에서 지선은 자신을 던져 비극적인 증명을 완성한다. 상원이 지선을 외계인으로 믿기 시작하는 결말은 남겨진 자 역시 진실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을 속이기 위한 777 슬롯말을 시작한다. 어떤 777 슬롯말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선택된 유일한 수단이지 않을까. 러닝타임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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