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차와 우롱차', 조용히 슬롯비비고을 우려내는 시간 [D:쇼트 시네마(136)]

류지윤 기자 (yoozi44@kestrelet.com)

입력 2025.10.16 10:01  수정 2025.10.16 10:01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중환자실에서 일한지 1년이 되어가는 간호사 슬롯비비고(손수현 분)이 고양이가 있는 한옥 카페를 찾아 소운(최희진 분)과 대화를 나눈다.


은재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소운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후배 간호사의 실수를 이야기 한다. 은재가 후배 간호사에게 복합적인 감정이 드는 건 과거 슬롯비비고을 보는 것만 같아서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환자를 돌보는 일은 보람도 있지만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기에 트라우마에 갇히기도 한다.


소운 그런 은재에게 어린잎에서 우린 슬롯비비고와 동정우롱차를 차례로 건넨다.


차의 특성과 먹는 방법을 설명이 지금의 은재의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입안에 머금고 있으면 어린 솜털이 남아 존재감을 발휘하는 슬롯비비고, 한껏 구겨져 있다가 퍼져 말끔한 맛을 내는 우롱차가 은재에게 따뜻한 처방전이 된다.


'백차와 우롱차'는 차 한 잔 앞에 마주 앉은 두 인물을 통해, 매일 죽음과 마주하며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지만 정작 슬롯비비고은 돌봄의 대상이 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다.


은재의 고백을 통해 돌봄의 노동이 남긴 상처와 회복의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중환자실 간호사 은재는 병원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매일 생과 사의 경계를 오가며 책임과 죄책감, 그리고 감정노동의 무게를 감당한다. 그가 소운을 찾아와 백차와 우롱차를 마시는 시간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슬롯비비고을 되돌아보는 의식에 가깝다.


소운이 건넨 차가 천천히 우러나듯, 슬롯비비고의 내면도 조금씩 풀려나며 굳어 있던 감정이 녹아내린다. 감독은 차의 특성에 집중해 ‘돌봄 이후에 남은 사람’의 마음을 비춘다. 마지막에 흐르는 신승은의 노래 '안락사'가 영화의 여운을 또 한번 깊게 우린다. 이민화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온 간호사들에게 바치는 헌정 영화다. 러닝타임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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